올림픽 전후로 신문등을 통해 이런 정리 기사가 한번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우리 언론은 개막식보고 열광이나 할줄 알지 좀 깊게 파는 쪽은 약하더군요.
베이징 올림픽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2008년 8월 8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29회 하계 올림픽이 열린다. 1968년 도쿄 올림픽,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세 번째로 개최되는 세계인의 축제로 개최 1년 전부터 베이징 전역은 이미 축제 모드.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을 준비로 분주하기만 하다.
▶2001년 6월 13일
1980년대 개혁 개방이후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중국은 올림픽 개최를 희망했다. 애초 중국이 노린 해는 2,000년.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맞이하는 벽두에 중국의 비상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1993년 9월 23일 모나코의 몬테 카를로에서 2000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가 선정되었다. 당시 베이징의 가장 큰 경쟁자는 호주의 시드니. 4차 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시드니는 베이징을 2표차로 누른다.
당시 베이징은 아시아 및 제 3세계, 아프리카의 표를 독식하다 시피 했고, 시드니는 유럽을 비롯한 서구의 표를 독식했다. 베이징의 가장 큰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서방의 중국 혐오증이었다. 특히 4년 전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에 대한 중국군의 발포 및 학살 사건은 인권을 중시하는 서구사회에는 큰 충격이었다.
중국은 절치부심했다. 중국이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바로 서방 달래기였다. 중국 정부는 점차적인 인권의 개선, 시민 참여의 점진적 확대를 약속했다. 아울러 중국은 2008년 올림픽 개최를 위해 모든 외교 역량을 투입했다. 그리고 2001년 6월 13일 2008년 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는 순간이 돌아왔다. 200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고 싶어하는 도시는 모두 4곳. 베이징, 파리, 토론토 그리고 오사카였다. 수천의 군중들은 이날 발표를 듣기위해 천안문 광장에서 뜬눈으로 밤을 샜다.
숨죽인 순간 국제올림픽위원회 사무총장인 안토니오 사마란치 Antonio Samaranch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2008 Beijing!’
그날 천안문 광장은 하늘을 수놓은 폭죽과 기뻐서 펄쩍펄쩍 뛰는 중국인들로 인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꽤 많은 중국인들이 2001년 6월 13일의 무더웠던 밤을 기억하고 있다.
▶서태후를 초청한 쿠베르탱
사실, 중국의 올림픽 도전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길다.
1896년 제 1회 올림픽 당시,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로 불리는 쿠베르탱은 서태후에게 중국의 올림픽 참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는 근대적 개념의 체육 선수가 없었고, 결국 올림픽 참가는 무산된다.
중국의 일반인들에게 올림픽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알려진 것은 1904년 3회 대회 때, 여러모로 서양 소식이 빨랐던 상하이의 한 신문사를 통해서다. 유교적 봉건사회였던 당시 중국인들에게 올림픽은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든 서양인들의 행사였다. 반바지를 입고 빨리 뛰는 걸 내기하다니! 하지만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 바빴던 개화파 인사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였다.
그들은 1910년, 오늘날의 전국체전과 같은 국내용 스포츠 대회를 창설하고, 1913년에는 필리핀, 일본, 중국의 발의하에 매 2년마다 열리는 극동올림픽 게임 極東選手權大會이라는 대회가 개최된다. 당시 가장 선진국이었던 3나라에 의해 근대적인 올림픽 게임의 아시아 버전이 탄생한 셈이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때 중국은 옵서버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가한다. 그리고 다음 대회인 1932년 L?A 올림픽 때 육상선수 리우창춘 을 파견 공식적인 올림픽 참가국이 된다. 참고로 단 1명의 출전 선수였던 리우창춘은 상하이에서 배를타고 장장 두달에 걸쳐 LA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는 육상 100m와 200m 예선 경기만을 참가했을 뿐이다. 참고로 그의 100m 최고 기록은 10초 78.
역사의 아이러니일지 모르지만, 중국이 올림픽에서 딴 최초의 금메달도 바로 1984년 LA올림픽이었다. 리우창춘은 그의 조국이 첫 금메달을 따기 1년 전인 1983년 베이징에서 사망한다.
▶두개의 올림픽 위원회 그리고 중국 스포츠의 비상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후 세계 제 2차 대전이 발발과 중국 내전으로 인해 중국은 올림픽 경기 무대에서 멀어져만 간다. 특히 타이완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갈린 두 개의 정부는 서로 ‘중국’이라는 대표성을 원했다. 비록 대륙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타이완 정부는 미국등 서방의 강력한 지지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대표성을 부여받던 시절이었다.
중국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때 ‘중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40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이후 26년간 타이완의 대표성 문제를 빌미로 IOC에서 탈퇴, 국제 올림픽 자체를 보이코트 한다.-최근의 티베트 사태로 인한 서방의 성화 봉송 저지 시위대에 올림픽은 단지 스포츠일뿐 정치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바로 그 나라가 말이다.-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은 IOC에 복귀한다. 그 말은 타이완 정부가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중국의 대표성을 상실했다는 뜻이었다. 이후 타이완은 중국 타이완 Chinese Taipei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이라고 불리게 된다. 하지만 중국은 IOC에 복귀만 했을 뿐, 1980년 중-소 국경분쟁이라는 지극히 ‘정치적인’이유로 소련 올림픽에도 불참한다.
정확히 32년만인 1984년 L?A에서 중국은 국제 올림픽 무대에 복귀한다. 그리고 감격의 첫 금메달을 비롯해 총 15개의 금메달을 획득. 종합 4위로 뛰어오르는 쾌거를 달성한다. 이후 88년 서울올림픽을 제외한 모든 올림픽에서 중국은 4위 아래로 결코 밀리지 않으며 인구 13억의 스포츠 강국임을 만천하에 입증한다.
심지어 2004년 그리스 올림픽의 최종성적은 종합 1위인 미국과 금메달 3개 차이의 2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최대 관전평중 하나는 중국이 종합 1위를 달성할 것인가의 여부다.
▶중국만의 올림픽 준비과정
중국은 올림픽 개최 확정 6개월 후인 2001년 12월 13일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결성 본격적인 올림픽 준비에 착수한다. 그간 20년간의 빛나는 경제성장을 구가하긴 했지만 중국은 여전히 낡았고, 국제적인 기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88년의 서울이 그랬듯, 중국도 올림픽을 계기로 수많은 국가 개조-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포함하는- 작업이 벌어졌다.
가장 눈에 띄는 작업 중 하나는 화장실 개조 작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화장실은 공터에 구멍만 뽕뽕 뚫어놓고, 어떤 칸막이도 없이 수많은 사람이 들어가 볼일 보며 담소를 나누는 구조가 일반적이었고, 그나마 나은 곳은 물이 흐르는 수로 사이에 걸터앉아 수로 아래로 흐르는 이물질을 바라보며 볼일을 보는 구조였다. 당시 외국인들이 가장 기겁을 하던 중국문화였던 셈.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약 6-8만개에 달하는 베이징내의 모든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겠다고 천명했다. 고질적인 물 부족 문제에 시달리던 베이징 시였기에 불가능 하다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사회주의 정권 특유의 무자비한 추진력은 실제로 화장실 문제를 해결했다!
화장실 외에도 산적한 문제는 많았다. 베이징의 끔찍한 대기오염, 질서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민의식이 문제였다.
한때 1년 중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100일 이하였던 베이징은 시 외곽 공장의 철폐, 심지어 연기를 배출하는 양고기 꼬치 노점상까지 시 중심에서 모두 몰아내는 극단적인 정책을 실시한다.
시민의식 개선사업은 밑바닥 끝에서부터 시작했다. 초기의 머리감기 운동을 지나, 2005년 도로교통법 제정및 건널목 건너기 운동 등이 바로 그 것. 최근에는 대중교통에서 노약자에게 자리 양보하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베이징의 사정은 나아지고 있다. 맑은 날은 과거에 비해 두배 가량 많아졌고, 버스에서 노약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모든 운동이 100% 성공할 수는 없는 일. 특히 도로에서의 난폭운전은 2008년 6월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도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 중국에서 파란불을 믿고 건널목을 무작정 건너면 차에 친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유용한 충고에 속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