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까마득한 이야기. 1960년대 말 서구인들 사이에서 아시아 배낭여행이 처음 붐을 불던 시기 3K는 구원, 내지는 천국과 비견되는 단어였다.
3K가 뭐냐고? 당시 배낭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 역활을 하던 K로 시작되는 세 곳의 도시, 즉 카트만두 Kathmandu, 카불 Kabul, 카오산 로드 Kaosan Rd의 약자다. 알다시피 카불은 1980년 구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이후로 배낭여행과는 아예 멀어졌지만 다른 두 곳의 명성은 여전하다.
인도는 일반적인 배낭여행지와는 좀 달리 발전했는데, 여행자가 아닌 히피들이 몰려들었다는데서도 남다르다. 당대 최고의 그룹이었던 비틀즈가 인도의 요가에 심취해 1년간 머물렀고, 그 즈음 반전, 사랑, 평화를 외치던 젊은이들은 서구에서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상을 찾아 인도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인도 서해안, 고아의 해변에 모여 때로는 나체 행진과 같은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인도에 녹아들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정적인 혁명사상이었던 히피즘은 오래가지 않았다. 혁명은 실패했다. 세상은 사랑과 평화라는 구호만으로는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고아의 해변도 변해갔다.
서양인 히피들이 나체로 거리를 활보한다는 인도 언론의 고발기사는 인도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히피들이나 즐기던 촌스러운 해변은 이내 몰려든 인도의 부자들로 인해 그들을 위한 개발이 시작되었다.
개발은 늘 상응하는 비용을 수반한다. 시간만 많고 돈은 없는 히피들은 이내 패잔병마냥 그들의 첫번째 낙원이었던 칼랑굿 해변을 기점으로 빠르게 외곽으로 밀려났다. 마치 서부개척시대의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히피들이 자리를 잡으면 이내 개발이 시작되는 슬픈 숨박꼭질이 시작됐다.
이제 고아에 외국인 히피/배낭여행자들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여행은 흥미롭다.
여행의 효율이 미덕인, 가이드북 조차 무거워 PDF파일을 스마트폰에 넣어가는 요즘에 악기를 들고 여행하는 히피의 후예들이 있고, 고아에서는 그들을 쉽게 만날수 있다.
짐의 반이 악기인 그들은 팔로렘 해변에 있는 클라우드 나인이라는 바에서 매년 겨울, 수요일마다 개최하는 오픈 무대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로 온다.
파리에서 출발해, 터키, 이란,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까지 온 한 히피 밴드는 그 엄청난 장비들을 모두 버스를 이용해 싣고 왔다고 한다. 버스를 대절한게 아니라, 각 나라의 시외버스를 타고 그 먼 길을 이어왔다는 이야기다.
'이 무대에 서기 위해 4개월이 걸렸습니다. 이란에서는 악기 반입을 금지해서 사흘간 국경 사무소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구요. 공연을 마친 후 저희는 다시 파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행위의 가치만을 따지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
그들은 무대에서 딱 두곡의 노래만을 했다. 이 들 말고도 노래를 하기위해 커다란 악기를 메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공연이 끝나고 히피 밴드는 공연 개런티로 받은 고아의 로컬맥주 한병을 마치 트로피마냥 높이 들었다.
와아하는 함성속에, 아라비아 해의 거센 파도소리는 그 순간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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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부터 모 기업 신문에 여행기를 연재하는데요.
분량이 원고지 8매입니다.
8매의 200자 원고지는 정말 애매하더군요.
이야기를 풀어내기는 적고, 개요만 후루륵 말해버리긴 너무 짧은.
12월까지 연재가 예정되었는데, 이제서야 슬슬 적응이 되나봅니다.
오늘 송고한건데, 마음에 드네요.
내용이 약간 류시화씨의 우화같은 느낌인데, 2009년 취재하면서 실제 본겁니다.
공연은 정말로 행복했었구요.
인도의 경제개발이후로 인도에도 너무 돈돈돈, 기회기회기회 하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류시화를 비판하며 환타라는 이름을 지었지만, 요즘은 우화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먹는 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