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하면 어김없이 따라오는 공해, 혼잡, 교통체증 같은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 부르사가 처음엔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터미널에서 한 시간 정도 걸려 시내로 들어가 숙소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우리가 간 숙소는 시내 중심에서 가까운 '귀네쉬 오텔'이라는 곳이었는데, 50대 중반 정도의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아저씨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고 여느 중년의 터키 여인처럼 헤자브(이슬람 여인들의 머릿수건)를 쓴 아주머니는 코란을 손에 들고 웃고 있었다. 마침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던 터라 한기를 느끼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그런 낌새를 눈치챘는지 주방에서 뜨끈한 차이(홍차)를 내 주신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사람들의 친절함과 이방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언제나 감동이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핫산 아저씨(주인아저씨 이름) 내외는 부르사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에 사시는데 자기 형님 내외와 한 달 씩 번갈아가며 숙소를 운영하러 부르사 시내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파견근무(?)인 셈이다.
귀네쉬 오텔 핫산 아저씨 내외NIKON CORPORATION | NIKON D5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10sec | F/4.5 | 0.00 EV | 31.0mm | Flash did not fire | 2007:09:25 16:21:57
부르사는 이스탄불과 멀지 않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고대로부터 수도권의 중요한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도시 이름은 B.C 2세기 비티니아 Bithynia의 왕이었던 푸르시아스 Prusias 1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로마, 비잔틴 제국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중요한 도시로 자리잡았다. 터키 역사상 가장 강대한 왕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2대 술탄 오르한 Orhan이 이곳을 정복해 1326년 초대 수도로 정한 이후 무라트 Murat 1세가 에디르네로 천도할 때까지 36년간 부르사는 제국의 초석을 다지는 곳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 때문에 부르사에는 오스만 제국의 시조인 오스만 가지를 비롯한 초대 술탄 다섯 명의 무덤과 울루 자미 등 제국의 영광을 간직한 빛나는 명소들이 가득하다.
우리는 시내 중심에 있는 울루 자미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여느 자미처럼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일단 웅장한 규모에 압도된다. 10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부르사의 자미 중 단연 독보적인 존재로 부르사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터키를 돌아다니며 수없이 많은 자미를 가 보았지만 울루 자미는 독특했다. 벽과 기둥에 이슬람 문자로 코란의 가르침과 이슬람 선지자의 이름이 씌어 있었는데 글자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이슬람에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경건한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마침 라마단 기간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코란을 읽으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교회나 성당과 달리 이슬람 사원에는 성인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조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코란의 가르침에 의한 것으로 하나님만이 진정한 창조주이며 인간이 만든 조각이나 그림은 자칫 우상숭배로 흐를 수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이슬람에서는 조각과 회화 대신 서예와 조형미술이 발달한 거라고 한다. 거대한 규모와 멋진 이슬람 문자와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우러진 울루 자미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울루 자미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이렇게 멋진 이슬람 문자를 볼 수 있는 자미는 터키에서 몇 안 된다.NIKON CORPORATION | NIKON D5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25sec | F/4.0 | 0.00 EV | 22.0mm | Flash did not fire | 2007:09:23 14: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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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루 자미를 나와 자미 뒤편에 자리한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부르사는 예로부터 견직물 산업이 발달한 곳이라 상업 도시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이 같은 전통 때문인지 시장 안에는 대상들의 숙소이자 교역의 장소였던 한 Han이 여러 곳 있었다. 우리는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코자 한으로 갔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견고한 사각형으로 지어진 건물은 둔탁하고 완강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건물 자체에서 고집스런 역사가 묻어나는 듯 했다. 이층으로 된 사각형 건물에는 전통을 이어 지금도 실크 제품을 파는 가게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몇 군데 가게를 기웃거리며 구경하다 1층으로 내려왔다. 정원에는 분수가 나오는 마스지드(예배를 드릴 수 있는 별채)가 있었는데 주변의 나무와 어우러져 한껏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야외 찻집에 앉아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오래된 건물이 전해주는 옛 이야기를 더듬으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다.
낭만이 묻어나는 코자 한의 정원NIKON CORPORATION | NIKON D5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30sec | F/5.0 | 0.00 EV | 18.0mm | Flash did not fire | 2007:09:24 14:14:06
길가의 되네르 케밥 집에서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몇 개의 자미를 더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때였다. 잠시 쉬다 저녁을 먹으러 나갈 생각이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보더니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신다. 알고 봤더니 라마단 기간에는 주변의 이웃과 친지들이 모여 함께 저녁을 먹는 전통이 있어 우리에게도 권한 것이다. 하도 간곡히 권하셔서 터키 가정식도 먹어볼 겸 아주머니의 호의를 받기로 했다. 대신 우리도 터키의 전통에 따라 뭔가 선물을 드리고 싶어 가까운 시장에 나가 양고기를 사다 선물로 드렸더니 왜 이런 걸 사왔냐고 나무라시더니 이내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하신다. 아주머니의 얼굴과 어렸을 적 시골에 사시던 외할머니의 표정이 겹쳐져 떠올랐다. 음식은 정갈하면서도 푸짐했다. 쇠고기로 만든 음식과 콩과 곡물로 만든 수프, 올리브와 대추야자 절임, 이름 모를 다양한 치즈, 빵과 샐러드 등등... 핫산 아저씨 내외분과 우리, 두 명의 서양 커플 여행자, 이웃에 사시는 아저씨는 마음껏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통 음악회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구경하러 갔다. 장소는 재래시장 안에 있는 조그만 차이집 이었는데 언뜻 보기엔 흔한 차이집과 별 다를 게 없었는데 부르사에서 꽤 유명한 아마추어 연주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연주회라고 해야 무대가 있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차이집에 모여 앉아 악기를 연주할 줄 알면 누구든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관객과 연주자가 따로 없고 차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노래를 부르는 그야말로 '어울림의 장' 이었다. 터키 음악을 접하고 현지인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곳이라 나의 터키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 가운데 한 군데이기도 하다.
아마추어라고는 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연주였다. 차이집 주인아저씨는 자기 가게가 문화공간으로 사용되는 게 대견한지 연신 자랑을 늘어놓았고, 열 두 세살 쯤 되어보이는 주인아저씨의 아들은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연주를 잘 했다. 연주하시는 분들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우리 편한대로 이름을 지었다. 희끗한 머리에 수염이 인상적이며 사즈를 연주하던 아저씨는 '고독한 기타맨', 풍채가 넉넉하고 인상 좋은 아저씨는 인도의 코끼리 신과 닮은 듯해 '가네쉬 아저씨', 영화 화양연화의 남자주인공을 닮은 노래를 잘 부르시던 '양조위 아저씨', 성악가에 견줄만큼 노래를 잘하고 유일한 홍일점이었던 '김추자 아줌마' 등등... 음악과 차가 어우러진 소박한 음악회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기타처럼 생긴 악기가 '사즈' 이방인을 따뜻이 맞아준 정 많은 사람들NIKON CORPORATION | NIKON D5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40sec | F/3.5 | 0.00 EV | 18.0mm | Flash did not fire | 2007:09:22 21: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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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우리는 버스를 타고 부르사 인근에 있는 주말르크즉 마을을 방문했다. 전통가옥이 잘 보존된 마을이라는 말이 귀를 솔깃하게 했기 때문이다. 주말르크즉에 도착할 무렵 잔뜩 웅크리고 있던 하늘에서는 기어이 가랑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인데다 날씨마저 궂어서 그런지 버스가 내리는 마을 어귀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돌이 깔린 골목을 따라 마을 탐방에 나섰다. 돌길을 따라 오스만 시대의 전통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포도 넝쿨과 화분으로 소박하게 장식한 아담한 집들은 시골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대도시 부르사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가랑비를 맞으며 골목길을 걸으며 세월이 묻어있는 옛집들을 구경하다보니 정말로 오스만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을 곳곳에 무화과나무가 많았는데 잘 익은 보라색 무화과를 몇 개 슬쩍 따먹기도 하고 집에서 만든 잼과 야채절임(완전 무공해인데다 정말 맛있음)을 파는 아줌마들과 되지도 않는 터키어로 몇 마디 나눠보기도 하고 농기구를 전시해 놓은 조그만 박물관도 구경했다. 가랑비가 어느새 머리까지 촉촉이 젖었지만 왠지 마을을 떠나기가 아쉬웠다. 부르사를 여행한다면 주말르크즉 마을을 꼭 방문할 것을 추천하고 싶다.
세월이 녹아있는 주말르크즉 마을의 집들 순박한 동네 아주머니가 파는 소박한 물건들NIKON CORPORATION | NIKON D5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30sec | F/4.5 | 0.00 EV | 18.0mm | Flash did not fire | 2007:09:23 10: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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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의 부르사 여행은 아무래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쩌면 기대를 전혀 하지 않고 온 곳이라 감동이 특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스쳐가는 나그네에 불과한 우리를 진심으로 따뜻이 대해 준 귀네쉬 오텔의 핫산 아저씨 내외분, 사즈를 연주하며 외국 손님이라고 특별히 맛있는 차이를 대접해 주던 고독한 기타맨 아저씨, 가네쉬 아저씨.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어쩌면 장소가 아닌 사람의 마음을 여행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며 부르사를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르사 여행정보
지리적으로 이스탄불과 가까워 손쉽게 방문할 수 있다. 이스탄불에서 수시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4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위에 언급한 것 말고도 부르사는 보고 즐길 거리가 다양하다. 터키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형극인 카라괴즈 공연, 메블라나 교단의 세마의식(콘야까지 갈 수 없는 여행자는 좋은 선택이다) 등. 또한 질 좋은 광천수가 솟아나는 온천이 주변에 있어 온천 마니아라면 행복한 비명을 참을 길 없다. 보너스 하나 더! 양고기를 저며 요거트와 곁들여 먹는 '이스켄데르 케밥'과 밤을 이용해 만든 간식인 '케스타네 쉐케르'는 부르사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먹거리다.
글쓴이 터키프렌즈(발간예정) 저자 샥티
울루 자미 앞에서 만난 소녀들NIKON CORPORATION | NIKON D5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500sec | F/6.3 | 0.00 EV | 31.0mm | Flash did not fire | 2007:09:25 15:5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