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8년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긴 무굴제국은 1564년에서 1574년에 걸쳐 아그라성을 건축하였는데, 지금의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은 건축광이라 불리우는 샤 쟈한 때의 일이다. 아그라 성은 왕궁과 전투요새의 역할을 동시에 할수 있게끔 설계가 되었는데, 성 주의의 해자나 20여 미터나 되는 높은 성벽은 이것을 잘 나타낸다.
무굴의 황제이던 악바르는 아쇼카 황제와 더불어 인도 역사상 둘밖에 안되는 '대제'라는 칭호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악바르 황제는 13세에 왕위에 올라 군사적인 정복전쟁에서도 능해 인도의 영토를 넓혔지만 그가 진정한 대제로써의 칭호를 받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은 바로 그의 포용정책이었다. 다른 종교에 비해 약간은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회교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힌두교, 불교를 포함한 당시 인도내의 모든 종교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의 당대에 시크교의 성지인 암리차르가 건설되었다는 것은 이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수 있겠다.
그의 증손자격인 아우랑제브의 편협성과 비교하면 악바르의 업적은 더욱더 빛을 발하는데, 그는 회교도 교리상 인정되지 않았던 우상에 대한 조각(왕성의 기둥에 코끼리를 조각)을 한 것이다.
이처럼 악바르의 체취가 강하게 남아있는 아그라 성은 샤자한 시대에 와서 한층더 증축이 되는데, 특히나 건축적 감각이 남달랐던 샤 자한에 의해 아그라 성은 더욱더 화려해진다.
이런 아그라성의 역사는 성을 중건한 샤 자한의 비극으로 더욱더 우리의 뇌리속에 강하게 남는다. 재위기간중, 델리의 붉은성, 자마 마스지드, 아그라의 타지마할등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낸 샤 자한은 말기에 자신의 막내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폐위되어 아그라 성에 갇혀서 말년을 보내게 되는데, 아그라성에서 타지마할은 아련히 보이게 마련이어서, 그곳에서의 샤 자한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19세기 이후 영국치하 시절의 아그라성은 군대의 주둔지로 사용이 되었는데, 그런 성내의 일부가 개조되면서 약간은 훙물스런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인도 고고학조사국에 의하면 성의 주위가 해자에 둘러싸여 있어서 습기에 의한 침식이 우려된다고 하는데, 먹고 살기도 힘든 인도에서 얼마나 이부분에 신경을 쓸지는 미지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