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마할을 조용히 관람하는 사람은 없다. 따지마할은 이래저래 시끄럽다.
커플들이라면 대부분 이런 그림
'당신도 나를 위해, 내가 죽으면 이런걸 만들어 줄 수 있어?'
남성들의 반응은 반반이다.솔직한 성격의 남자라면 묵묵 부답.
'당연하지! 이거뿐이야. 이보단 좀 커야지.'정도 말하는 남자라면 상당한 정치력의 소유자다.
독신인 여성들은 이 앞에서 주로 한탄을 한다.
'에휴 난 이런거 만들어줄 어떤 놈 없나?'
만약 그녀에게 흑심이 있다면 들이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나 할 수 있는데……'라는 말 한마디면 우선 기본 점수는 따고 들어가지 않을까?
내가 아는 욕쟁이 친구중 한명은 따지마할에서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씨발새끼 만들어 놓고 졸라 뿌듯했겠네!'
늘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뭔갈 선물하고는 능력있는 남자라고 뻐기는 그 다운 말이었다.
아마 그가 이렇게 욕을 한 이유는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인도로 날아온 탓이리라.
1631년 7월 17일, 무굴의 5대 황제 샤 자한의 아내였던 뭄타즈 마할이 38살을 일기로 죽었다.
스무살에 첫 아이를 가진이래 18년동안 무려 13명의 아이를 낳은 그녀는 결국, 14번째 아이인 가우하라 베굼 Gauhara Begum을 출산하는 과정에 죽고만다.
사실 황후로서의 삶은 겨우 4년째가 되던 해였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18년동안 14명의 아이를 낳는 것도 좀 상식 밖이지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뭄타즈 마할은 한 곳에 정착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무굴제국은 동아시아의 전통과 달리 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전통이 없었다. 왕자들끼리 자유경쟁을 통해 가장 나은 아들(바꿔 말하면 아버지에게 가장 잘 보인)이 황위를 계승했다.
이러다 보니 왕자들은 전공을 세워야만 했고 끊임없이 병력을 이끌고 원정에 나서곤 했다.
다정도 병인가 하노라라는 싯구는 아마 이 커플에 해당되는 말일지도 모른다.
샤 자한은 원정을 할때조차 뭄타즈 마할과 동행했다.
뭄타즈 마할의 임신 기간을 고려했을때, 그녀는 상당 기간동안 임부의 상태로 여행을 해야만 했다. 그것도 그냥 여행이 아니라 전쟁터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그렇게 쌓은 공적으로 샤 자한은 황제가, 그녀는 황후의 자리에 올랐건만 겨우 4년 만에 죽게 된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
'나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덤을 만들어 주세요.'라는 말에 대해 마치 철없는 황후 마마. 즉 마리 앙뜨와네뜨의 화신인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옥중에 갇힌 춘향이가 이도령에게 했던 '내가 죽으면 도령님 선산에 묻어주오.'라는 유언과 더 연관성이 있다고 느껴진다.
뭄타즈의 집착은 회한에 가까웠다.
샤자한도 냉큼 그러마라고 약속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샤자한은 슬픔이 깊었던 나머지 뭄타즈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모두 세었다고 한다.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보다 한 살이 많아서 당시 서른 아홉이었다.
그의 백발설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정자왕(!) 샤 자한은 이후 단 한 명의 아이도 가지지 않는다.
유능했던 꿀람(샤 자한의 왕자시절 이름)은 뭄타즈가 사망한 이후 변해버렸다. 제국의 통치보다는 제국의 영화를 바탕으로 심시티 Simcity에 몰두했다.
뭄타즈가 죽고 바로 1년 후, 따지마할의 공사가 시작된다. 공사가 시작됐다는 말은 이미 설계를 비롯한 계획이 수립됐다는 이야기. 이건 다시말해 샤 자한은 뭄타즈가 죽자마자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의미다.
연 인원 20만 명, 약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자재를 날랐다. 그러고도 22년이나 걸렸다.
설계는 이란 출신의 천재 건축가 우스타드 이샤 Ustad Isa(주1)가 맡았다. 우스타드 이샤는 자신이 생각하는 천국의 이미지를 따지마할에 그대로 투영했다.
따지마할 아름다움의 핵심은 바로 완벽한 대칭구조, 돔과 아치에서 느껴지는 우아한 곡선미, 그리고 대리적 공예의 일종인 피에트라 두라 Pietra Dura(인도에서는 빠르친 까리 Parchin Kari라고 부른다.)의 아름다움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이딸리아에서 전래된 피에트라 두라는 따지마할 장식의 핵심을 차지하며 결국 인도에서 만개한다. 피에트라 두라의 기법은 사실 요즘의 눈으로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대리석 바탕위에 준보석이나 보석을 붙여만든 일종의 모자이크. 한국의 나전칠기와도 재료가 다를뿐 원리 자체는 같다.
이렇게 지어진 따지마할은 빛의 예술을 선사받았다. 순백의 대리석 자체도 태양의 위치에 따라 흰색과 노랑색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여기에 보석 모자이크가 더해져 시간에 따라 다른 색감을 자랑하게 된 것.
쳐다보는 각도에 따라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달리 보이는 따지마할의 마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완공되던 날, 황제의 몸으로 독신을 지키며 뭄타즈만을 그렸던,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샤 자한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애정도 길이라면 길이었지만, 외길만을 달려온 샤 자한의 말년은 우울했다.
샤 자한은 아그라를 온전히 뭄타즈만의 도시로 남기를 원했다. 사랑하는 부인이 죽은 아그라는 더 이상 제국의 수도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아그라에서 버틸수가 없었다.
샤 자한은 아그라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수도를 델리로 천도한다.
타지마할이 한참 지어지고 있을 때,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델리에서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왕궁인 붉은 성, 인도 최대의 이슬람 사원인 자미 마스지드가 따지마할과 동시에 건설됐다.
후일 건축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샤 자한은 어쩌면 아주 약한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통치 포기와 심시티 놀이는 제국의 재정을 파탄 지경까지 몰고간다.
그럼에도 그는 쉬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게 남은 생은 그저 그녀를 기념하기 위했음이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샤 자한은 야무나 강 건너, 그러니까 따지마할 맞은 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따지마할과 똑같은 무덤 건설을 계획했다고 한다. 검은 따지마할은 바로 샤 자한 자신의 무덤이었다. 흑/백의 따지마할 사이에는 아치로 만든 다리가 연결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검은 따지마할이 없는 이유는 샤 자한이 뭄타즈마할과의 사이에서 난 여섯번째 자식인 아우랑제브가 반란에 성공, 샤 자한을 강제로 폐위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아들은 큰형인 다라 시코만 편애한 아버지를 극도로 싫어해서 따지마할에서 겨우 2km 떨어진 아그라 성의 남동쪽 끝에 있는 작은 정자에 가둬버렸다. 샤 자한은 그 곳에서 부인의 무덤을 7년간 바라보다 쓸쓸하게 죽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가 죽은 후, 뭄타브 마할의 무덤 옆에 묻어줬다. 합장이라고 본다면 배려일테고, 무굴의 황제중 유일하게 무덤 더부살이중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아우랑제브를 끝까지 그를 경멸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어쨌건 이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대신 가장 시끄러운 무덤속에서 지금도 안식을 취하고는 있다. 아마 하루에도 수백번씩 '그럼 그 사람들이 여기 묻혀있는거야?'라는 누군가의 말소리와 함께 부러움 가득한 여인네들의 한탄을 듣겠지만 말이다.
